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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한복’이라 불리운 현대 한복 브랜드의 10년사

정윤맘 2008. 12. 26. 15:35

‘생활한복’이라 불리운 현대 한복 브랜드의 10년사
생활 문화 운동으로서의 우리 옷 재현

80년대 운동권 진영의 전통에 대한 의식 표출과 이 때 파생되었던 상품들 -걸개그림 이미지의 티셔츠나 개량 티 등- 은, 민족 문화에 대한 연구가 비판 논리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대안 문화로 제시할 만큼 구체적으로 진척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문화 운동이 ‘생활’의 요소를 더해가면서 보다 풍부한 문화적 프로그램으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태껸 등의 무예, 수지침과 같은 생활 의학, 천연 염색, 옹기 만들기, 무공해 농산물 키우기, 흙집 짓기 등의 체험이 대표적이며, 문화 연구소 및 소집단을 중심으로 체험 학교나 문화 기행 등의 실질적인 교육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생활문화운동>이 단편적인 체험 차원이 아닌 실질적인 생산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니 농작물 공동체, 우리 농산물 지키기 운동본부, 풍물 탈춤 강습소나 문화 답사 단체, 귀농 단체 등이 이때에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입거리 문화 운동을 전개해오던 뜻 있는 젊은이들의 ‘우리 옷 알고 지키기’ 차원에서 발전한 것이 바로 생활한복 브랜드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주의의 태동과 「생활한복 1세대」


88년 올림픽 이후 한국에는 세계에서 뛰어난 민족의 정체성을 높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가치로 부상하게 됩니다. 특히  개방의 압력이 서서히 높아지면서 우리 민족 정체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한편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이 1차로 극에 달한 것은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된 1993년입니다. 이때의 정서를 대변할 만한 대표적인 것이 있으니 ‘신토불이(身土不二)’라던가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여’와 같은 유행어, 93년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편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후 금융위기로 인해 등장한 97년 IMF 지원체제는, 오직 근대화․산업화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고속경제성장의 신화를 창조한 대한민국 국민에게 커다란 위기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겪게 된 원인을 정부정책이나 대기업의 잘못된 경영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해외의 자본 탓으로 돌리는 시각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반외세를 지향하는 나라사랑 민족주의를 팽배하게 하였습니다. 과거의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던 80년대 학생운동의 성향에 비하면 상당히 온건한, 전 국민의 지지와 공감대를 형성했던 민족의식의 등장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입거리 문화 운동에 참여했었던 소수 집단들로 시작된 연구소 또는 공방 제품 수준의 초기 생활한복은 이 전통문화에 대한 전 국민적인 감정 변화에 힘입어 유례없는 판매고를 기록하게 됩니다. 이 때 급부상하게 된 생활한복 브랜드를 업계에서는 흔히 ‘생활한복 1세대’라 일컬으니 <생활문화 연구소>로 시작한 최초의 브랜드 질경이를 비롯해서, 문구류 등 생활용품 공급업체로 출발했던 <여럿이 함께>, 지역 문화 운동을 펼쳐오던 원주의 <새내>, 그리고 우리 옷 입거리 연구회에서 출발한 <돌실나이>가 그러합니다. 대표자 혹은 디자이너가 대부분 386세대 학생운동권의 미술/의상 전공자 출신들로서 영세한 규모의 자본금과 사업장으로 시작하였다가 예견치 못한 사세 확장을 경험하며 생활한복의 기성복 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주역들입니다.


이들이 선보인 생활한복은 예복의 수준에 머물렀던 종래의 전통한복이나, 드레스 형태의 개량 한복과는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한복 착용을 대중화하기 위한 실용적인 옷으로 면, 마 등의 천연소재 제품을 위주로 하였으며, 긴 저고리-통치마의 투피스 형 여성한복을 선보이고 매듭단추로 여밈을 활용하는 등 입고 벗기 쉬운 구조의 디자인이 안정적으로 발달해 있었으며, 가격 또한 실크 예복과 저렴하게 차별화 되어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을 지향했던 서민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세대 생활한복 브랜드들이 추구했던 이미지도 서민의 일상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인간다운 정감과 자연의 은은한 빛깔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급속한 팽창과 쇠퇴에 이은 성숙기

1996년 정부에서는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을 ‘한복 입는 날’로 제정하니, 이는 일상복으로서의 우리 옷인 생활한복 붐에 박차를 가하는 기폭제의 역할로 작용하게 됩니다. ‘한복 입는 날’ 공표를 기점으로 이후 많은 후발 브랜드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재래시장에서 브랜드화 된 <씨실과 날실>과 <나들잇벌>을 비롯해서 속옷 업체에서 런칭한 <예나지나>, 단학선원에서 출자한 <달맞이>, 시장의 티셔츠 업체를 인수해 출발한 < 우리들의 벗>, 건강식품 다단계 판매업을 하던 <삼매야> 등을 들 수가 있으며 이 외에도 숱한 이름의 옷들이 생활한복의 이름을 달고 생산되었습니다.


IMF로 문을 닫을 지경이었던 시장은 생활한복의 붐으로 활기를 띄었고 기존의 한복시장마저 생활한복 위주로 판도가 바뀌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장성을 빠르게 뒤쫓는 것은 결국 무분별한 디자인의 졸속 상품으로 연결되기 마련이었고, 전통성은 물론 심미성에 있어 비난 받는 경우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은 한국인으로서 우리 옷을 입어야 하는 당위성을 상실하게 하였고, 급기야 생활한복은 소박한 서민의 이미지 대신 ‘마당쇠’와 같은 저급하고 촌스러운 가치로 떨어지기에 이릅니다.

이를 떨치기 위해 생활한복의 고급화 또는 예복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화려한 이미지의 생활한복들이 명절이나 혼수 때에 성수기를 맞이하기도 하지만, 이는 ‘생활 속의 우리 옷’을 표방하던 생활 한복 본연의 가치 지향점을 더욱 잃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기회만을 포착하여 시장에 뛰어들면서 일상복에 주력하지 못했던 예복 위주의 브랜드들은 현재 대부분 없어졌거나 매우 작은 규모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급속한 팽창과 쇠퇴가 뒤이은 시기를 지나 지금은 몇 안 되는 브랜드들이 명맥을 유지하면서 ‘생활한복’이라 불리었던 우리 옷은 다시금 도약할 수 있는 성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집필 : 강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