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타일

저고리 먼저입기

정윤맘 2008. 12. 26. 15:21

우리나라 복식은 각 시대마다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소위 말하는 유행이 시대와 왕조마다 존재했던 것이다. 정보의 세계화가 가능해진 오늘날 세계의 패션과 유행에 관한 정보가 인터넷이나 통신매체 등을 통해 빠르게 전달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단지 현대에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에도 국제적인 유행이나 패션 경향의 전파와 적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약간의 시간 차이는 있었지만 유행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고 상당히 국제적인 유행을 받아들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경우, 지역적으로 경상도에 치중되어 있어, 고구려 나 백제를 통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외국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유행과 패션 경향을 복식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여러 가지 문화와 제도 등을 중국 당나라로부터 받아들였고, 교류 과정에서 당시 중국의 수도에서 유행했던 최신패션까지도 받아 들여 이를 즐겼다.
[신라시대 의상]
[경주황동토용(여)]
당시 중국에서는 저고리를 입은 뒤에 치마를 입어 몸을 날씬하게 보이는 패션이 유행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한복을 입는 방법과 다른 것이었다. 고구려 벽화에 남아 있는 그림과 경주 황남동 출토의 흙 인형을 보면 고구려 여성들이 옷을 입는 방법은 치마를 먼저 입고, 그 다음에 저고리를 입어 치마허리를 덮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유행되었던 옷을 보면 입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삼국을 통일한 뒤, 당시 유행의 중심지였던 중국의 수도 낙양에서 직수입된 방법으로 옷을 입었다는 이야기다. 이 방법은 기존에 옷을 입는 방법과는 완전히 달라서, 저고리를 먼저 입은 다음 치마를 입는 것이었다. 당시의 이런 변화는 신라시대 흙으로 구워 만든 인형(俑)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용강동에서 나온 여자 모습의 흙 인형을 보자. 이 흙 인형이 입고 있는 옷은 우리나라 전통의 옷 입는 방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상반신에는 상의의 여밈도 없고, 치마허리가 가슴까지 올라와 저고리의 형태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치마허리에서 올라간 어깨끈이 상의에서 보이며, 팔에는 단지 너른 소매만이 있어 상의인 저고리가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치마가 저고리를 덮어 버린 것이다. 치마를 가슴 위로 상당히 올려 입었기 때문에 하반신의 길이가 매우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 남녀복식]
이런 방법은 삼국시대에서는 볼 수 없던 방법이며 오히려 서양의 엠파이어스타일과 비슷하다. 하반신을 길어 보이게 입는 이런 방법은 중국의 당나라를 비롯한 실크로드상의 여러 나라에서 유행했던 착용 방법이었다. 이것이 신라에 수입되어 대부분의 여성이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옷을 입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유행이 언제 시작되었고 언제 끝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특정한 패션이 신라로 유입되어 흙 인형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고리를 입은 후 치마를 입는 유행은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는 신라와 달리 기존의 방법으로 옷을 입은 그림을 볼 수 있다. 공양하는 여성을 보면, 저고리 단이 치마 위에 드러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치마를 나중에 입었던 착용 방식이 삼국통일 후에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현상이라 하겠다. 이렇듯, 패션의 유행은 현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고대에도 유행현상이 있었고 외국에서 유행한 패션경향을 받아 들여 응용하다가 우리 실정과 미감에 맞지 않았을 경우에는 또 과감히 버리고 다른 방식을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